Heavy Rain
Games 2010. 3. 26. 13:36
상호작용을 대전제로 하는 미디어인 게임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에 좋은 매체가 아니다. 잘 짜여진 이야기를 가진 게임들이 없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잘 전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유명한 경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게임에서의 이야기 전달은 항상 게임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상호작용성과 부딪혀 덜그럭거린다.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매우 선호했지만) 그만큼 비판도 많았던 히데오 코지마의 Metal Gear Solid 시리즈의 최종장인 4편을 플레이해 본 사람이라면 영화와 같은 일방향매체가 가질 수 있는 좋은 장점들을 게임에서 그대로 차용하는 순간 큰 단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게임 장르로서는 스토리텔러에 가장 가까웠던 어드벤처 장르가 순수 장르 자체로서의 힘을 잃고 대신 대부분의 게임들이 그 편린을 품은 채 각자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끝이 있는 이야기에 천착하는 내게는 달가운 일이었지만 그 방법론 자체의 완성은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Quantic Dream의 디렉터인 David Cage는 시작부터 이 지점에 주목했던 소수의 게임 개발자 중에 하나였다. 그는 줄곧 게임의 얼개로서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Quantic Dream의 이전작 [Fahrenheit] (발매지역에 따라 Indigo Prophecy)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으며, 근작인 [Heavy Rain]은 그 연장선 상에 있다.
현재 대부분의 게임들이 취하는 이야기 전달은 상호작용과 이야기 전달을 완전히 분리하고, 이야기의 전달은 컷신(Cut-Scene)을 통해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앞서도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게임이 가지는 본질적인 매력 중 하나인 상호작용 및 사용자의 능동적인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는 형태에 가깝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서, [BioShock]나 [Half-Life] 시리즈가 보여준 것과 같이 수동적인 이야기 전달을 거의 배제하고 게임이 구축한 세계의 문맥을 사용자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탐색하도록 전개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상호작용을 통한 이야기 전달 구조라는 점에서 혁신적이지만, 전자의 방식과 반대로 사용자가 충분히 능동적이지 못한 경우 완전한 이야기 얼개를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실제로 예로 든 두 게임 모두 지역화가 매우 잘 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만으로는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방식과는 다르게, 사용자와 게임 간의 상호작용을 사용자의 선택으로 분기하고 그에 따르는 반응을 이어 이야기 얼개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의 전달과 사용자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 장르 가운데 하나인 RPG장르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Mass Effect]와 같은 경우가 좋은 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Heavy Rain]은 기본적으로는 사용자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분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 간다는 구조 자체는 앞서 이야기한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구현하는 데 있어 매우 독특한 방법을 선택하여 그 전달과정을 사용자의 능동적인 선택과 융합하고자 한다. 요 근래의 액션 게임에서 흔히 쓰이는 QTE(Quick Time Event)를 통해 조작중인 인물의 행동을 결정하고, 이에 더하여 전통적인 형태의 선택지 형태의 대화시스템을 결합하여 사용자의 선택을 유도한다. 선택과, 선택의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던 기존의 게임들과 다르게 [Heavy Rain]의 플레이는 그 둘간의 경계가 매우 흐릿하다. 컷신과 같이 처리된 리얼타임 렌더링 이벤트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사용자의 응답을 요구하고, 그 응답은 이야기의 전개를 바꾸는 선택이 된다. 심지어는 사용자가 반응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게임의 플레이 자체가 이야기 전달 구조 사이사이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과 분기가 이야기 전달을 방해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이야기 전달이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Fahrenheit] 역시 이러한 게임 디자인을 목표로 설계하려고 했던 것이 비교적 명확하게 보이는 게임이었지만, 소위 DDR 게임이라 불릴 정도로 단순한 형태의 상호작용형태와 함께 선택에 따른 이야기 전개 요소가 극단적으로 축소되어 있어 다소 부족한 점이 적지 않았다. [Heavy Rain]은 말하자면 이 게임의 적자에 가까운 형태로서 이전작이 가지던 문제들을 대체로 잘 정리한 디자인을 보여 준다. 특히나 [Fahrenheit]가 가지고 있던 큰 단점 가운데 하나였던, 이야기 자체의 얼개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여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야기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문제 또한 [Heavy Rain]에서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완성되어 있다. 게임이라는 매체 특성에는 크게 나쁘지 않지만 약간은 과도하다 싶은 주제와 그에 따르는 이야기 전개는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완성도 자체에는 평균점 이상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Heavy Rain]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 자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부 어드벤처가 세상을 뒤엎을 즈음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새롭고도 가장 강력한 매체라고 믿었다. 그 강력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은 영화나 소설같은 매체가 가지는 이야기의 수동성을 넘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터랙티브 무비가 어드벤처와 나아가 게임의 미래라고 역설하던 순간은 쉽게 사라지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지만 [Heavy Rain]을 플레이하면서 인터랙티브 무비가 꿈꾸던 미래를 보는 기분을 느낀다. 분명 이 게임이 가지는 한계는 적지 않고 이러한 방식이 모든 게임의 미래가 될 수도 없지만, 가능성의 제시로서는 좋은 답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