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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26 황해
  2. 2008.02.17 추격자 1

황해

Movies 2010. 12. 26. 21:28

여러 가지 면에서 지독했던 영화. 전작인 [추격자]가 인물 대 인물의 대결 구도에 전력을 다해 영화를 밀어붙였다면, 이번에는 사건이 파국으로 커져가는 양상을 지독하게 쫓는다는 인상이 강하다. 독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든 신들이 폭포처럼 터져나오지만 후반부 들어 그 신들이 연결되는 사이에 틈새가 얼깃 보이기는 한다. 다만 이야기의 얼개에 집중했다기보다는 사람을 숨막히게 짓누르는 파국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다고 보면 될 듯. 하정우 / 김윤석이 보여주는 연기의 성취는 훌륭했던 전작에 비교해서도 너무나 뛰어난데, 화면에 잡히는 것 만으로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김윤석도 훌륭하지만 영화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하정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본인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군대를 두 번 간 느낌에 가깝다고 인터뷰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영화에서 보이는 것 만으로도 촬영 현장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짐작이 갈 정도. 악착같이 이 정도까지 성취를 이루어 낸 감독은 전작에 이어 자신만이 해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감히 최고라고 망설임없이 부를 수 있는 [추격자]에 비교하면 사람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만한 구석은 제법 있다. 일견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극적으로 희화화된 캐릭터들이, 현실의 서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잘 조절된 잿빛의 화면 톤을 통해 화면 전개를 현실과 관람자에게서 분리시켜 내는 부분은 경이롭다. 하지만 이렇게 잘 만들어진 화면에 비해 사운드쪽에서 시종일관 대사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약간 아쉬운 대목. 구남역의 하정우의 연변사투리나 발성이 매우 극적인데, 이 부분이 뭉개져서 전달되는 부분이 있어 이야기 전개에 맥이 끊기는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추격자]가 보여주었던 인상깊은 엔딩신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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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Movies 2008. 2. 17. 03:00


[추격자]의 전개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다른 영화들, 특히 범죄를 다루는 스릴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물의 뒷 배경을 설명하거나 사건의 발단과 전개를 공들여 묘사하는 등의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영화는 영화 내에서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현실에 습자지를 대고 그려놓은 것 같은 공간을 화면에 풀어두어 지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면 속의 세계가 [우리가 살아 숨쉬던 어떤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일 따름이다. 그렇게 솜씨좋게 들어낸 빈 시간에 자리잡은 것은 이유와 발단과 전개가 생략된 사건 그 자체이다. 초반부 극히 짧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영화는 인물을 설명하지 않고 아주 간략하게 앞으로 필요한 부분만 보여준 다음 당연한 기대를 배반하고 사건까지 모두 끝내버린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야기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인 범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손에 쥐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흔히 스릴러 영화에서는 수수께끼를 영화 전개의 가장 큰 장치로서 활용하고는 한다. 범인은 모두 알지만, 주인공은 모르는 것들을 풀어 내는 일련의 과정을 축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즉 주인공과 지켜 보는 사람들은 같은 사실을 공유한다는 점이 핵심이 된다. 그러나 [추격자]에서는 이 구도를 역으로 뒤집어 버렸다. 초입부가 지나는 순간 우리는 범인과 같은 사실을 공유하게 된다. 누가 죽었고, 어떻게 죽었으며, 누구는 어떻게 되었고, 또 가장 중요한, 엄중호가 찾는 누군가는 어디에 있고. 그리고 관객이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쫓는 쪽에 서 있는 경찰과 엄중호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으며 온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뛰어 다니면서야 한 가닥 한 가닥 잡아나가는 데서 생기는 그 엇나감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대척점을 이루는 지영민-엄중호의 대립구도에서 엄중호에게는 상대적으로 감정이입이 쉬운 반면, 지영민에게는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러한 구도를 이루어 내는데 도움이 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추격자]에서는 인물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편적으로 필요한 사실만을 보여주거나 제시함으로써 인물을 완성시키고, 그 이미지만을 끝까지 이용한다. 엄중호나 지영민 모두 단단하게 포장된 상자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엄중호가 전직 형사였고 뇌물을 받아 해직되었으며 현재는 전화방으로 먹고 살고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엇나간 나쁜 놈이라는 사실까지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사건이나 사실을 연결하는 동기나 배경같은 것은 일절 볼 수 없다. 지영민의 경우는 이보다 더 극단적이다. 가족이 있다는 전개상 필요한 부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그는 살인을 한다. 살인의 동기마저도 [불명]이고, 불완전한 추측이 그 자리를 메운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같은 좀 과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대체적으로 살인자에게 일정 부분의 배경을 주어 심정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것들을 걷어냄으로써 기계적으로 살인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감정 이입을 차단하는 효과를 이끌어 낸다.

이러한 효과를 좀 더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배우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하정우의 열연은 참으로 놀랍다. 초반부 망원우체국에서 여자를 만나 집으로 데려가는 부분이나, 얼마 후 경찰서에 끌려와 초콜릿을 열심히 빨아먹는 장면에서의 지영민은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김미진을 살해하기 위해 정을 내려치는 모습에서도 그러한 순진함이 조금씩 섞여 배어 나오면서 그 순간의 파괴력을 끌어올린다. 반대로 그러한 천진한 외피가 완전히 깨어지는 부분에서 보이는 거친 모습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살인자로서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연기에 있어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천진난만한 외피를 반쯤 깨고 본성을 드러낼 때의 모습을 지독히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지영민이라는 인물을 살인자로서 [공포스럽게]느낄 수 있게 한다. 처음 경찰서에 잡혀가서 반쯤 웃으면서 살인을 했음을 고백하는 장면과 탈출한 김미진을 다시 마주 본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어떻게 나왔느냐고 묻는 장면에서 보이는 그 비현실적이면서도 일상적인 모습은 지영민이라는 인물의 묘사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정우가 인터뷰에서 했던 지영민에 대한 분석 中 ["피자 시킨 게 도착해서 막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경찰서에 들어간 거다. 그래서 경찰서 있는 내내 그 피자만 생각하다 풀려났다고나 할까. 그것도 계속 다이어트 하다가 딱 하루 마음껏 먹기로 한 날에 말이다"]는 부분을 보았을 때 하정우가 만들어낸 지영민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잡을 수 있다.

김윤석의 엄중호는 지영민보다는 좀 더 생생해서 감정이입이 쉬운 인물이다. 엄중호도 지영민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잘 가려진 인물이기는 매한가지어서 많은 부분을 추측에 기대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속물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엄중호가 지독한 추격을 반복하면서 어느 새인가 자신의 이득과는 관계 없는 어떤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승리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조금은 작위적인 똑똑하기 짝이 없는 김미진의 딸이 이를 위해서 소비되는 인물로 보이기는 하지만 김윤석은 다른 배우들에게서 쉽게 발견하기 힘든 그 퇴폐적인 이미지를 속물적인 엄중호에 완전히 일치시킨 후 그가 그 속물적인 계산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발산할 때의 순간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걸게 뱉어내는 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점만 놓고 보아도 엄중호라는 인물을 그려낸 김윤석의 가치는 매우 크다.

영화 초입에서 만들어낸 관객과 주인공과의 엇나감 이외에도 영화는 곳곳에서 한 발자욱씩을 비틀어낸다. 쫓고 쫓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시간만에 쫓기는 사람은 경찰서에 앉아 긴 시간을 하릴없이 보낸다. 남은 것은 확고한 증거를 찾아야 하는 경찰과 잡혀간 아가씨를 찾아야 하는 엄중호의 수색이다. 그러면서도 우왕좌왕하는 경찰보다 더 열심히 악착같이 뛰어다니는 엄중호가 지영민이 스스로 고백한 살인을 가장 나중에야 믿는 인물이라는 점도 기묘한 역설이다. 이러한 엇갈림들이 하나둘씩 엉켜가면서 만들어내는 정보의 공백이 관객들이 긴장을 뺄 힘을 주지 않는 가장 큰 힘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보지 않더라도 영화의 영상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독하게 일상적이고 평이한 공간이어서 현실적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골목길 언저리에 위치한 집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비일상, 게다가 그 비일상을 저지르는 인물마저 일상적인 모습으로 미소지으로 유유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과 살해보다도 외려 공포스럽다. 담배가게에 들어선 지영민의 모습은 그러한 일상과 비일상이 한 곳에서 뭉쳐 폭발하는 지점이다. 과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폭력의 묘사와 함께 감정 이입을 위한 쇼트들이 번갈아 반복됨에도 그 장면은 그래서 지독하게 무섭고 아프다.

[추격자]는 참신하(기만 한) 설정이나 거듭되는 반전에 함몰되지 않고도 얼마나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사건을 터뜨리고 그 이야기를 착실하게 엮어나감으로써 영화는 영화 시간 내내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짧지 않은 상영 시간이지만 시종일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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